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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화제인물

삼성家의 대비마마, 박두을 이야기

by inmul-store 202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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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을)

 

박두을, 삼성가 창립자 이병철의 아내이자, 내조의 여왕

 

(이병철의 회고)

 

이병철은 박두을에 대해서 “전통적인 유교 가문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고,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 치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처럼 수신제가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 아내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이야기했다.

 

(내조의 여왕)

 

이런 이병철의 말처럼 박두을은 묵묵히 내조하는 스타일이었으며, ‘가정’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사실, 이병철의 성격이 굉장히 깔끔하고 고집이 셌다고 하는데, 이런 예민한 이병철의 생활습관들을 잘 맞춰주었다고. 일례로 손질하기 까다롭다고 하는 명주옷을 매일 손질하여 준비해 주거나, 일정한 시간에 이병철이 쓸 따듯한 목욕물을 항상 준비해왔다고 한다.

 

(말년)

 

박두을은 결혼 이후 남편과 함께 산 기간보다 떨어져 산 기간이 더 길었다고 한다. 말년에도 박두을은 이병철과 같이 안 살고, 장충동 집에서 손자들과 함께 살았다고 하며, 이병철은 기관지가 약했던 관계로 공기 좋은 한남동 집에 살았다고.

 

(손자손녀 사랑)

 

생전에 며느리들에게도 잘했지만 특히 손자 손녀들에게 각별했다고 한다. 먼 길 출장 가는 손자 이재용 씨에게 더운밥 한 그릇을 친히 먹여야 마음 편해하던 할머니였으며 이부진, 이서현, 이윤형을 끔찍이도 아꼈다고. 그 때문인지 박두을의 병세가 크게 나빠졌을 때 미국 유학 중이던 재용 씨가 급히 귀국해 할머니 곁을 지켰는가 하면, 숨을 거둘 때까지 손자 손녀들이 병원 주변을 떠나지 않으며 돌보았다고 한다.

 

(유교걸)

 

삼성가의 정신적인 기둥으로서 묵묵히 버텨온 것은 그녀의 성격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자라온 환경이 굉장히 유교적이었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박두을의 아버지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었으며, 박두을은 어린 시절에 선비였던 아버지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사실, 박두을 집안이 이병철 집안보다 더욱더 부자였다고 하는데, 자식들에게 종종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 수가 없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실제로 박두을은 시집올 적에 몸종을 비롯하여 몇 명을 하인을 데리고 올 정도로 부자 가문이었다.

 

(스님)

 

재밌는 일화로 박두을이 15~16세 때 절에서 시주 나온 한스님이 그녀를 보고,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되거나,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안방마님이 되겠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후 박두을은 20살에 이병철과 결혼을 하게 된다.

 

(맘고생)

 

대한민국 최고 부자 남편을 둬서 고생하나 안 했을 것 같지만 사실 맘고생이 심했다. 먼저, 장남 맹희가 아버지의 신임을 얻지 못해 후계구도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차남 창희는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다고 고집 피우는 바람에 아버지 눈밖에 난 데에 이어 사카린 밀수사건을 책임져 구속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다. 심지어 둘째 아들 창희가 백혈병으로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에 대한 맘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이것 말고도 박소저, 구라다 등 이병철의 부인이 2명 더 있었으니, 여자로서도 맘고생이 심했을듯하다.

이상 박두을의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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