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소개/기업인

이재용, 이부진 할아버지! 삼성 창립주 이병철에 관한 모든 것

by inmul-store 2021. 5. 19.
728x90
728x90

 

 

(이병철)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 등 범삼성가의 시초이자 경상남도 의령의 천석꾼이었던 이찬우의 막내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

 

(지수 공립 보통학교)

 

이병철은 11살에 지수 공립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 공립 보통학교로 전학을 갔고, 이후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여기서 지수 공립 보통학교에 대한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 이곳은 구철회 LG그룹 창업고문,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구정회 전 금성사, 허준구 전 GS건설 명예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구평회 전 호남정유 사장, 구두회 전 LG 사장, 허신구 LG 명예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엄청나게 많은 경제인을 배출하였다. 심지어 LG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구자경 전 LG그룹 명예회장은 이 학교에서 교사로도 근무한 적 있다.

 

(박두을)

 

17살에 결혼했다. 상대는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이때 이병철 스타일이 지금 봐도 세련됐는데, 포마드 스타일 머리에 간지 나는 안경 등 엄청나게 잘생겼다. 이병철은 연상녀인 박두을을 두리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서로 좋아 죽었으며, 박두을 얼굴도 약간 둘리를 닮은 거 같아서 귀엽기도 하다.

 

(일본 유학)

 

결혼식 후에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일본에 가서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일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뭐하러 더 유학생활을 하나?” 하는 회의감으로 1931년에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노름)

 

고향으로 돌아와 건강이 회복된 후 가장 먼저 한일이 집안의 머슴들을 해방이었다. 이유는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함께 노름판에 빠졌다.

 

(노름 회상)

 

후에 노름판에 빠졌던 것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행동력)

 

노름판에서 놀았던 추억들이 사업을 할 때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그 덕분인지 행동력이 엄청났다.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951년 삼성물산 설립,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하였으며, 19645월에 TBC, 다음 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 뒤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지금과 같은 삼성그룹 형태가 된다.

 

(생산라인)

 

이병철이 삼성전자를 설립할 때 생산라인 비화는 전설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전자 쪽 관련하여 한국의 기술력은 부족했는데, 박정희 정부가 미국과 관계가 나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이 기술을 절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가 일본에 접근해서 "야 너네 힘들지? 너네 지금 엔고 현상 오면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잖아. 그러니까 간단한 조립은 한국에서 생산하는 게 어때? 우리 인건비 싸!" 이렇게 한국이 일본 쪽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설득해서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간단한 조립공장들을 짓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기술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자제품의 생산라인 기술. 하지만 한국기업들이 하청업자다 보니까 대충 흐름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시찰단을 보내 배우게 했는데, 여기서 일본 얍쌉이들이 필기구나 녹음기 등은 절대로 지참 못하게 한 채, 공장을 눈으로만 보게 했다.

 

그래서 이병철도 꼼수 하나를 쓰게 되는데, 시찰단을 엄청 많이 보냈다. 그리곤 시찰단 개개인에게 각자 'A에서 B구간', 'C에서 D구간'등 담당자를 정해서 외우게 했으며, 시찰한 다음. 호텔에 모여서 '내가 맡은 분야는 이런 기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삼성전자는 탄생했고, 우여곡절 끝에 배운 기술로 현재 일본의 모든 전자기업들을 합쳐도 못 이기는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43만 평)

 

1970년대에 삼성전자가 수원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 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때 삼성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나? 어디 내 말이 틀렸나?”

 

(세계 최초)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진입 장벽이 높았다.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이놈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해서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을 꾸준히 높여 갔을 정도.

 

이후 19861Mb D램 개발에 성공했지만 "우리나라 반도체가 일본 도시바 것을 베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를 본 이병철은 분노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가서 진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 실 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

 

이에 진대제는 16Mb D램은 반드시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폐암)

 

생전에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해 19871119,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였다. 하지만, 암 발견 초기부터 관련 질병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해 치료에 활용하며 관리한 덕분인지 투병 중에도 반도체 산업 진출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여담으로 폐암이 유전됐는지, 큰 아들인 이맹희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도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워커홀릭)

 

이병철은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서 이 회장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히키코모리처럼 있었던 이건희와는 다른 부분.

 

(공개채용)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 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병철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찌라시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김종희)

 

한화그룹의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과는 12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종희 회장의 성격이 깍듯했기에, 이러한 점 때문에 이병철 회장이 특히 재계 후배로써 아꼈다고 한다. 그 덕에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대를 거쳐서도 삼성가와 한화가는 두터운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스티브 잡스)

 

1983년에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잡스와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잡스는 태블릿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삼성이 그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협력사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 것. 이병철은 잡스와의 만남 이후 그에 대해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의령군)

 

최근 의령군에서, 호암 이병철대로라는 명예도로를 부여했다. 아마 한국이 성장하는데, 이병철 회장이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상 삼성그룹 창립주 이병철 이야기 끝!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