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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기업인

1945년 1월9일 ~ 2020년 10월25일, 이건희 이야기

by inmul-store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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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이건희, 삼성그룹 2대 회장이며,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함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 한국에 반도체를 처음 도입 당시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반도체를 인수했으며, 지속적인 설득으로 이병철로부터 삼성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 낸 선견지명이 탁월했던 인물.

 

(양화대교)

 

이런 이건희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눈에 띄었다. 이건희의 고교 동창인 홍사덕의 인터뷰에 따르면, 1965, 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2한강교(양화대교)는 통일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다리인데 다리 경간을 좀 더 넓혀도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으며, 학과 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보여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라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유학)

 

이런 이건희의 독특하고 참신한 안목은 일본의 소학교로 유학 갔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유학 생활은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건희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특히 일본에서 가정교사의 특별 교육만 받아 평범한 친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건희는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수십 차례 보며 각각 주연, 조연,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는 안목을 길렀다고.

 

(후쿠다 보고서)

 

이런 이건희의 안목이 가장 빛을 발했던 사건은 후쿠다 보고서이다. 후쿠다 보고서는 일본 교토공예섬유대 명예교수인 후쿠다가 1989년의 삼성의 상황을 보고 만든 보고서이며, 이 보고서에는 당시 1류였던 소니에 비해 삼성전자의 디자인은 2류에 불과하다는 내용과 삼성이 양적 성장에만 치중하고 있어서,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짝퉁 제품으론 세계시장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건희는 후쿠다 보고서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몇 차례나 정독했으며, 여기에 큰 충격을 받아 19936월에 신경영을 선포하였다.

 

(신경영)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처음에 삼성 임원진들은 이건희의 신경영을 반대하였으나 이건희는 임직원들의 낡은 정신을 꾸짖는다는 이유로 그들 앞에서 불량 핸드폰 15만 대를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이건희의 초일류를 향한 경영 혁신을 통해 결국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으며, 후쿠다 고문에게 돈을 두둑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엄청 먹었다고.

 

(밀라노혁명)

 

디자인 혁명 역시 질적 혁신과 함께 글로벌 삼성을 만든 두 축 중 하나이다. 그는 '미래에는 핸드폰들 성능이 다 비슷비슷하게 좋아질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그때 가서 승패를 가릴 요소는 디자인이라 단정, 1990년대에 삼성의 '디자인 혁신'을 지휘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선언한, 이른바 '밀라노 혁명'인데, 이건희는 여기서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고객들이 제품에 마음을 뺏기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그 짧은 순간을 사로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심근경색)

 

이렇게 삼성그룹의 제2의 창업주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으나 2014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쓰러졌다. 그는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되었으며, 스텐트 시술을 받고 나서 VIP 병실에 입원했다. 참고로 삼성병원 x층에 이건희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층이 있다고 한다.

 

(메르스)

 

투병생활 1년 차 조금 넘어서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파동이 일어났고 3차 감염자 태풍의 눈으로 삼성서울병원이 주목받는 와중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병원 측에서도 이건희의 병실 이동 계획은 없고 입원 수술 상황 역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홍련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엽)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이걸 보고 이재용이 잘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라고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별세)

 

20201025359, 재활에 힘을 쏟았지만 6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오랜 투병생활 때문에 나온 신부전 때문이라고.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진행하였으며,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부인 홍라희와 장남 이재용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고 한다.

 

(선산)

 

발인 후 아버지 이병철 때처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부지 내에 속한 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보였지만 이병철의 조부모 등을 모신 수원 가족 선산에 안장되었다.

 

 (한화 김승연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사망 소식에 가장 슬픈 날이다라며 애통해 하기도 했다. 이건희와 김승연은 선대째부터 내려져 오는 인연으로 10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경영 멘토로서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승연이 중대한 경영상 결정 사항이 있으면 이건희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반대로 당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이었던 이재용을 김승연에게 보내 경영 수업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고. 또한 이건희 본인이 별장으로 놀러 갔을 때 한화 이글스가 전지훈련을 오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승지원으로 김승연을 불러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지내기 직전인 2014년엔 삼성그룹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한화도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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