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家의 사도세자, 이맹희 이야기
이맹희, 삼성그룹 비운의 황태자. 193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으며,
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의 첫 번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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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는 1966년에 이병철이 자신 대신 삼성그룹을 맡게 할 정도로 촉망받던 후계자였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생활을 거칠 정도로 '황태자'에 어울리는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 박두을 또한 이맹희를 삼성그룹 후계자로 강력하게 추천할 정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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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家의 장남으로써 탄탄대로를 걸었으나 삼성을 맡고 난 후 연이은 경영실적 악화와
둘째 아들 이창희가 ‘이병철 회장은 기업인의 자격이 없다. 박탈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일러바친
이른바 ‘청와대 투서사건’으로 이맹희 또한 아버지 이병철과 조금씩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병철은 이 일을 주도한 둘째 아들 이창희를 호적에 파 버렸으며,
이맹희 또한 투서에 대한 동조자로써 죽는 날까지 의심하였다고.
그 여파로 1973년 여름. 이병철은 이맹희를 불러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17개 계열사 임원직에서 3개만 빼고 모두 내려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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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가 아버지 이병철과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본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맹희는 14개의 임원직을 내려놓은 후 실망감에 빠져 일본 동경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후 이병철이 일본으로 들어왔을 때,
외국에 있을 땐 무조건 아버지에게 마중을 나와야 한다는 삼성家의 관례를 깨고
이맹희는 아버지의 마중을 나오지 않았으며,
이병철이 삼성 동경지점에 들렀을 때 이맹희에게 동경지점에 출근하라고 말하자,
"지가 동경에 쉬러 왔는데 뭐 하러 지점에 나갑니까? 저, 지점에 갈 필요 없심더.”라고 말해
아버지 이병철을 향해 대놓고 대들었다고 한다.
후에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당분간 일선에서 물러서 있는 처지에서 영원히 삼성을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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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 삼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삼성은 이맹희 지우기에 나서기 시작한다.
1979년. 이맹희는 서울 치안본부에 있던 한 친구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는데,
바로 삼성에서 이맹희 자신을 섹스 중독증 환자로 몰아간다는 것.
또한 삼성에서 이맹희 납치를 위해 형사 두 명을 요청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맹희는 이 이야기를 듣고 거실에 휘발유 통 3개를 준비해놨는데,
어느 날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이맹희를 납치하기 위해 거실로 쑥 들어왔다고.
여기서 이맹희는 준비해둔 휘발유통을 청년들에게 부은 뒤 라이터를 켰다고 한다.
그걸 본 청년들은 줄행랑을 쳤으나,
이 일이 있은지 얼마 뒤 이맹희의 집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이맹희의 물건들을 몽땅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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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구로 이사 가서 이맹희 자신의 후배 중 한 명인 고려병원 의사에게 또 다른 놀라운 말을 듣게 되는데,
삼성 집안 식구 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이맹희가 정신병 환자라는 증명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삼성은 부산 어느 의사에게 돈 300만 원가량을 주고 이맹희가 정신병자라는 의사 소견서를 받아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이맹희는 아버지 이병철의 눈을 피해 백령도와 마라도, 영덕 등을 떠돌며 생활하게 된다.
이때 이병철은 각 은행마다 전화를 해 이맹희가 융자를 받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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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성격이 급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이맹희는 이러한 삼성 식구들에 대한 분노로
삼성 비서실 직원을 향해 총 6발을 발사하기도 했다.
1984년 이맹희가 부산 해운대 별장에 있을 때
현관문에서 건장한 사내 둘이 들어오더니 "삼성 비서실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이맹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엽총을 쏴서 별장에서 몰아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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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맹희는 아내와 자식들과의 인연을 끊은 채 야인생활을 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이 이토록 이맹희에게 모질게 대했던 이유는
바로 청와대 투서사건의 공범이 이맹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병철은 이맹희에게 "무릎 꿇고 사과한 다음, 다시 내 밑에서 일을 하라"라고 전했으나
이맹희는 자신의 무고함을 말하며 아버지 이병철을 만나지도 않고 서로 계속 엇나가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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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병철과 이맹희의 극심한 갈등도 결국엔 풀어지게 된다.
이병철은 1986년 폐암을 진단받게 되고, 이후 1년 6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게 되는데,
폐로 시작된 암은 뇌로까지 전이되어 죽음을 앞두기 직전이었다.
1987년 9월, 이맹희는 이병철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병철이 누워있는 병상으로 찾아왔다.
이때 이병철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고.
이맹희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병철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후에 이맹희의 회고록에서
“내가 첫날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릴 때, 말씀은 없으셔도 얼굴 가득히 밝은 표정을 짓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계속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얼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미소는 무려 15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따듯한 미소였다."
긴 세월을 돌아서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화해를 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상 이맹희의 이야기 끝!